신춘 패륜

by 2016-02-08

올봄 <학원 가기 싫은 날>에 엄마를 씹어먹고 싶다던 한 어린이의 시 때문에 왕왕 시끄러웠다. 사실 젊은이들이 상주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그런 류 ‘패드립’을 마주하는 건 이미 너무나 쉬운 일이다. ‘패드립’이란 ‘패륜’과 ‘애드리브’가 결합된 신조어로서, 고백하건대 나도 해본 적이 있다. 10년 전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예심을 통과한 작품이다. 소설의 주요 사건이 대놓고 ‘패드립’과 관련된 것이었고, 그에 대한 아파트 주민들의 위선적 반응과 주인공의 위악적 대응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였다.

당선을 은근히 원하면서도 정말로 당선될까 두려움에 떨었던 건, 당선되면 패륜아로 낙인찍혀 진로에 방해될 것이라 생각해서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된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문학청년 특유의 과대망상증이 문제. 신춘문예 당선이 영화제 레드카펫만큼 주목받던 시절은 이제 전설이 되었음에도 현실감 없이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다. 문자문화가 시대정신을 견인하던 때가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당장 다가오는 새해 첫날에 신문을 펼치며 당선작을 궁금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소심한 속물성 때문이기도 했는데, 가출과 자퇴를 일삼고 자살까지 고민했다는 문단선배들의 역동적인 개인사에 비해 얼마나 쩨쩨한 전전긍긍인지 모른다. 식민, 분단, 전쟁, 가난, 독재와 같은 외부의 선명한 적이 사라진 대신, 우리에게 자기검열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어떻게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까닭모를 불안을 품고 스펙을 관리하는 세대정서에 기반하여, 자주 다음과 같이 되뇌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정규직에 골인해야 하니, 나쁘게 찍히지 말아야지.”

끝내 휘둘리지 않은, 가장 힘센 것은 놀랍게도 문학이었다. 자의식 과잉과 가련한 계산속 사이에서도 소설만큼은 초연한 타자였다. ‘잘난 척’도 ‘착한 척’도 필요없었다. 소설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연막이 날 용감하게 만들어줬다. 소설은 언제나 소설을 쓴 자보다 솔직하다.

800여 편이 넘는 응모작 중 본심진출작은 내 것을 포함해 총 15편, 제목까지 논급된 4편 안엔 들지 못했으므로 최종 심사평의 총론 부분은 자연스레 내 글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혔다. 개인적인 문제에만 갇혀있다는 게 비판의 골자였다. 이는 이른바 거인의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이 2000년대의 좀스런 청년들을 향해 내뱉는 폭력적 훈계 내지 정치적 요구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동무는 개인주의적 정신을 버리시오.” <광장>에서 이명준이 월북 후 편집장에게 들은 충고와도 닮았다.

제목은 <소리>. 도입부는 찢어질 듯한 알람 소리가 아파트 벽을 가르고 끔찍한 까마귀 떼를 소환하는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다. 누군가 자명종 시계를 분리수거하지 않고 그대로 종량제 봉투에 넣어버린 바람에, 아파트단지 공동 쓰레기통 깊숙한 곳으로부터 위협적인 경종이 울리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알람에 이어 호명, 욕설, 소문 등 ‘소리’의 종류를 중층으로 쌓아 의미의 대위법을 구성한 것이 [개인적 문제에만 갇힌 요즘 애들의 빈곤한 사회의식]으로 쉽게 묶일 만한 것이었는가 싶다. 정작 사회학적 상상력만을 강조하다가 인류학적 상상력을 잃은 자들이야말로, 문학을 이데올로기의 방편이자 계몽과 혁명의 도구로 삼고, 계급투쟁 프레임에 인간이라는 신비와 실존을 가두어 능욕한 죄인이 아닌가. 머리 굵어졌다고 시건방진 ‘소리’ 한 번.

패륜이 그리스로마신화의 단골 소재라는 상식이 뒤늦게 머리를 친다. 개인의 꿈이 무의식의 반영이라면, 신화는 인류의 꿈이다. 프로이트, 융, 캠벨이 한 얘기다. 불안한 현대인으로서 힐링하고픈 대중독자를 꾸준히 사로잡아온 심리학이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공간은 원체험의 세계다. 신화는 원체험 속 패륜의 박물지이며, 욕망과 윤리의 간극에서 인간의 내밀한 충동, 생의 감각, 그리고 일탈된 무의식을 형상화한다. 미적, 윤리적 돌파를 해내는 위대한 작가를 꿈꾸기는커녕 패기없이 정규직이나 희망하던 국문학과 모범생의 소설이 패륜에 얽힌 오늘날의 사회적 징후를 저도 모르게 품을 수 있었던 건, 얼핏 말도 안 되는 막장드라마로 가득찬 신화가 우리에게 고전으로 읽히는 이유와 감히 통한다. 또한 굳이 사회를 위한다는 명목을 앞세우지 않고, 개인의 내면에 정직하게 천착한 덕분이라 믿는다. 누구나 나 자신으로선, 자기구제가 곧 세계구제다. 개인은 거인보다 크다.

※ 이 글은 <중도일보> 2015년 12월 8일자 지면에 게재된 필자의 글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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