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아이들이 깨어있길 기대하지 마시라

by 2016-02-01

우린‘깨어 있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1985년생에서 1995년생까지. 우리 세대는 IMF체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다수가 돈에 휘청이는 가정의 굴곡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 좋은 대학을 갈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장래희망은 ‘부자’인 경우가 많았다.

    현 20대가 성인으로서 경험이 쌓인 MB정권부터 세상의 양극화와 물질만능 그리고 계급문제와 사회문제를 정권의 탓으로 돌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깨어 있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왜 광장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느냐 따져 물었고, 하나 같이 특정인을 좋아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이상했다. “분신을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며 철도청 노조에 75억 손해배상 가압류를 제기하고 노동자탄압의 새 장을 연 이는, 그들의 로망인 가장 ‘깨어 있다’던 사람이었다.

    2015년, 그것도 얼마 전에, 나는 공론장을 통해 참여연대 진보진영 교수를 비판했다. 어김없이 ‘친재벌’ ‘청년우익’ ‘일베류’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재밌게도 비판자들은 모두가 ‘형 같은 대통령’ ‘사람이 먼저인 대통령’을 기리는 내용들을 얘기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만 나오면 그 놈의 ‘민주화’. 나는 민주화의 숭고함을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잘 모를 뿐이다. 아마 우리 세대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겪어보질 않았으니. 다들 재벌의 부패를 모르는 것도 아니며, 옹호하는 것도 아닐 테다. 다만돈 없이는 죽도 밥도 안 되는, 10만 명이 SSAT를 보고 대기업만이 ‘달관’을 벗어나게 해줄 시대를 살 뿐이다.

    “20대는 왜 보수화 되는가?”를 묻는 이들 눈엔 절대 보이지 않는 사실이 있다. 광우병 파동을 사기로 생각하고, 민주화를 희화화 하고, 특정정권과 세력을 혐오하는 이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공통점이 있다. 타인에 의해 씌워진 ‘보수화’란 껍데기 속에 ‘깨어 있는 시민진영’의 “사람이 먼저”란 ‘위선’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 옆자리 친구가 죽건 말건 내가 사는게 우선인 시대와 세대. 돈 없으면 머리가 좋아도 좋은 대학은 못 가는 시대와 세대. 그 사다리들은 누가 차버렸나? 유일한 개천용 코스였던 사법고시마저 로스쿨로 대체한 이들은 누군가?

    경제민주화를 숭고한 반독재이자 반재벌의 연장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경험과 시대와 우선가치가 다르니까. 하지만 맹목적으로 ‘깨어 있다’는, 본인들의 깨어 있음에 어긋나는 모두를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든다. 심지어 그들이 나처럼 민주화에 대한 직접경험이 없는 세대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의 위선이 싫다. 현 세대 아이들은 독재와 재벌이란 절대악보단 “절대로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에 맞닿아 있고, 민주화란 절대선보단 윗세대의 위선에 직접 경험으로 맞닿아 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먼저다”를 순순히 믿기엔 “먼저인 사람만이 살아남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린 ‘깨어 있으라’는 강요가 싫다. 살아있는 게 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혐오의 결은 누군가에 책임을 지울 수는 있을지언정 우리 세대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주진 않는다.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일관할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쟤네가 더 나쁘다’ ‘무슨 개소리냐’ ‘우익, 친재벌, 쓰레기들’ 어차피 답은 정해져있다. 우린 재벌이 좋은 게 아니고 기득권이 좋은 것도 아니다. 당신들의 ‘위선’이 더 싫을 뿐이다.

    대학축제에 거진 다 벗고 있는 애들, 아니면 ‘돈이 짱이지’를 외치는힙합퍼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포크송 같은 소리좀 그만 해라. 아프리카TV 억대 연봉 BJ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고고함 혹은 보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외면을 숭고함으로 부른다고 해서 크나큰 ‘정의’라든지 ‘대의’가 가능할 것이란 생각 좀 그만 해라. 그 아름다운 ‘민주적’ ‘진보적’ ‘반독재적’ ‘반재벌적’ ‘감성적’ ‘사람이 먼저’인 소리들이 절대 20대를 이끌 수 없는 세상이다.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생존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닌 토양에 발을 디딘 20대들. 그 토양은 누가만들었나. 누가 그 책임에서 발을 뺄 수 있나.

    ‘깨어 있음’이 우리 세대에게 부정적 형용사가 되는 이유는, 한 쪽을향해 눈 뜨고 있지 않은 모든 이들을 ‘죽은 시민’ 취급하고 있단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실상 우리 세대에게 ‘깨어 있는 시민’은 친노 진보진영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를 넘어선다. 자신들과 다른 가치관 자체를 ‘선악’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는 것은 애국보수, 친박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깨어있음에 대한 강요, 즉 ‘깨강’은 좌우를 막론한다. 우리 애들은 ‘척’할 여유가 없다. 살아내야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살기’는 당연히 특정진영의 ‘깨어 있음’과는 무관하다.

    특정진영을 향한 청년세대의 신경질적인 반감이 주목받는 것은 세대를 포괄하는 공통기억 때문이다. 우리에겐 2009년 광우병 파동이 ‘거짓’이었다는 공통기억이 있다. 애초 특정성향을 ‘깨어 있음’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상대방을 죽었다고 판단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성향에 대한 확고한 인식에 기반한 정치참여는 어느 방향으로든 건강함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깨어 있으라’는 주문은 진영에 상관없이 윗세대에 대해 ‘그거 거짓말이잖아요’란 항변을 거쳐 청년세대에 의해 혐오된다.

    민주화나 산업화 같은 절대가치로 이어질만한 공통경험이 없는 현 청년세대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저 더 싫은 쪽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9년을 성인으로 경험하지 못한 1991년생-25살 미만 청년들과 애초 탈정치 경향이 심한 청년세대 전반을 예측한다면, 광우병을 제외한 공통경험의 결과인 ‘반감’과 ‘혐오’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경험은 꽤나 명확해 보인다. 바로 ‘생존의 위기’다.

psycho-29041_640

우린 파묻히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고용동향에 따르면 명목 청년실업률은 최대치를 지속적으로 갱신하고 있다. 10%를 넘어 전체 실업률(3.9%)의 3배에 가까워졌고, 체감 청년실업률은 30%를 훌쩍 넘는다고 한다. 전경련 조사 결과 30대 기업들은 2015년 신규채용을 6% 정도 줄일 방침이고,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졸 취업문이 지원자 100명 중 단 3명에게만 열려있다는 충격적인 조사결과를 최근 내놓았다.

    와중에, 내년부터 관련법에 의해 정년이 현재의 58세에서 60세로 연장된다. 정년연장은 내년에 3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에서 먼저 시행되고, 2017년부턴 전 사업장과 공무원으로 확대된다. 안 그래도 저성장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정년연장으로 인건비 부담이 늘면 신규채용을 줄일 게 뻔하고, 노조나 기업, 기성세대의 양보를 이끌어낼 만한 사회적 장치는 없다. 경기침체 장기화와 기업투자 기피, 청년층의 높은 대학 진학률, 대기업 쏠림현상 등의 분석은 넘치지만 실질적인 해결책은 없다.

    최근 그나마 화제가 됐던 경기도 부천의 세 자매 동반 자살사건을 돌아보자. 그 원인에 대해 경찰에선 “두 명은 몇 달 전, 한 명은 최근 실직해 낙담이 컸던 것 같다”고 밝혔지만, 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없다. 사실상 청년세대의 ‘죽어감’은 감기만큼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많은 기성세대들은 현 상황을 ‘일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중장년층과 청년층의 자리싸움’으로 조명하고, 청년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지나 않을지 걱정한다.

    내 관점은 조금 다르다. 일단 노조나 기업, 국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설지는 당연히 미지수다. 그리고 그들이 심각하게 놓치고 있는 부분은 ‘혐오의 결’과 그 ‘깊이’다. 일단 우리 사회 내 그 어떤 이념지형을 향한 ‘깨어 있음’도 생존이 붕괴된 청년세대에 절대가치로 기능하긴 힘들어 보인다. 나아가 단순히 일자리 문제로 논하기 이전 삼포, 사포, 오포를 넘어 칠포 삶포라 불리는, 1등 시민이 될 가능성이 거세된 세대의 반사회적, 비윤리적 가치관 왜곡을 짐작해봐야 한다.

    일베 하나로 덮어대고 있는 종기만한 청년세대의 반사회성, 비윤리성 말고도, 실질적으로 ‘생존’이란 몸통 줄기와 연관된 판단의 맥락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2012년 기준 국내 불법도박 시장규모는 95조였고, 현재는 100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매매 시장을 포함한 전체 지하경제 규모는 추산이 어렵다. 문제는 이런 뒤틀린 시장들이 청년세대 생존의 대안이 되고 있단 점이다. 생태적으로 성매매업에 청년들이 종사할 확률이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미 많은 청년들에겐 불법도박 관리, 포주, 대포차 판매 등에 몸담는 지인들에 대한 서사가 퍼져있을 것이다.

    단순히 지하경제에 종사하는 오염된 청년세대의 절대 숫자가 문제란 것이 아니다. 기저에 퍼져나가고 있는, 아니 이미 뿌리 깊은 물질만능주의, 약육강식과 맞닿은 반사회성이 세대 전반을 통해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떤 모습의 반감 및 혐오로 표출될 지는 섣불리 알 수 없다는 것. 붕괴된 가치관들이 ‘깨어 있음’이 완전히 붕괴된 정치세력을 낳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지난 2월, KAIST 미래전략대학원 주최로 진행된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토론회에서 20~34세 청년층의 42%가 ‘붕괴,새로운 시작’이라 답했던 것이 화제가 됐었다. 명목 실업률이 장기 졸업연기 및 대학원 진학으로 사라져버린 세대의 심정을 모두 담지 못하듯이, 지하경제로 파묻혀버렸거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막나가는 숨겨진 세대들에게도 관심이 기울여져야 한다.

‘달관하라’는‘깨어 있으라’를 대체할 수 없다

    ‘달관’. 지난 봄, 조선일보가 강력히 시동을 걸었던 ‘달관세대론’이 주류미디어를 점령했었다. 우리 세대가 저가 옷을 입고 비정규직으로 일해도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일본의 반 토막 정도 시급으로 ‘사토리’가 될 수도 있다는 세대론.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에게 ‘보이고 들리는 얘기들’은 세대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한숨 따위를 가공해서 뿌리는 정도지. ‘깨어 있으라’는 윗세대에 대한 반감 탓에 현 세대가 무조건적 수구세력이란 얘기가 얼마나 웃긴 일인가. 엄한 데다 소리치라는 이들이나, 무조건 닥치라는 이들이나. 그저 세대가 느끼는 혐오의 수치만 다를 뿐이다.

    찻잔 속 태풍과 같은 담론 바닥은 테이블 밑 지진을 무시하고 있다. 사실상 내진설계라곤 해본 적 없는 한반도 사회구조 안에서 진심으로 세대를 분석하고자 했다면, 조선일보가 측정기를 들이대야 했던 곳은 ‘간신히 달관하고 있는’ 세대의 상위층이 아니었다. 시급 5500원짜리 알바도 무한경쟁의 시대다. 차라리 다수가 ‘악’과 ‘비시민’으로 애써 외면하고 있는 일베나 네이버의 댓글창을 보는 게 나았으리라. 심심찮게 보이는 ‘독재가 낫다’ ‘차라리 망해라’를 터무니없다고 무시만 하기엔, 세대에 주어진 기회의 총량이 터무니 쥐뿔도 모자라서 경쟁이다.

    ‘달관 세대 속에 스티브 잡스가 있다’는 2015년 3월7일자 조선일보 칼럼은 아직도 버리지 못한 기성의 미련을 여실히 보여줬다. ‘창업’으로 세대의 ‘창조’를 몰아갔던 ‘실크세대론’ 역시 6년 전 조선일보의 작품이었다. 힐링과 자기계발 춤사위에 한복까지 입혀버린 스티브 잡스는 개콘에 나와도 더 이상 웃기지 않을 만큼 식상한 캐릭터가 됐다. ‘창조’나 ‘창업’은 쌓아놓은 대기업들 현금으로 먼저 진행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세대보편의 버팀목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한 돈’이지 ‘기업가정신’이나 ‘노오력’과는 다르다. 돈이 돈을 버는 마당에 돈 없이 돈을 벌라는 게 다른 말로 창조경제 청년창업 아니겠나. 애초 그런 건 강요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세대를 통틀어 1, 2명 나오면 다행인 얘기다. 그나마 우리 애들이 고분고분 듣고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자칫하다 돈 못 벌까봐, 취직못할까봐. 그게 이유의 전부다.

    ‘달관’? 사실 우리는 그저 ‘달리던 관성으로 가고 있는 세대’다. 일단 대학까지는 달렸으니까, 일단 취업준비는 달리고 있으니까. 연료는 다 떨어져 가는데 일단 가던 대로 몸뚱이 굴리는 거지, 희망이 중요하겠는가? 옆에 애들 다 뛰고 있는데. 좌우를 막론하고 기성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세대보편이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춰 섰을 때, 모두가 방에 처박혀 은둔형 외톨이가 돼줄 것이라 생각하나? 기성이 경악하며 규정하던 우리세대의 비이성과 반사회성은 분명 지진의 전조다. 서서히 달궈지고 있는 휴화산에 콘돔만한 ‘달관’이란 껍데기를 씌워봤자 잉태되는 분노에너지를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 에너지로 우리 세대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잘 모르겠다. 이리 보나저리 보나, 좌로 보나 우로 보나. 파묻히고 있는 아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깨어 있길’ 바라지들 마시라

Tags: ,

카테고리